뜨개 가이드8분 읽기
푸르시오부터 얀치킨까지, 뜨개인이 몰래 쓰는 말들
해리포터 크루시오를 희화화한 푸르시오, 거꾸로 걷는 팅크, 실과 치킨의 대결까지. 처음 들으면 웃기고 알고 나면 공감되는 뜨개 말을 풀어 봅니다.
발행 2026-09-16

푸르시오는 크루시오에서 왔습니다
뜨개 모임에 처음 가면 대화가 암호처럼 들립니다. “그 가디건은 결국 푸르시오 했어요”, “스타시가 또 늘었어요”, “얀치킨에서 졌어요.” 도안 속 겉뜨기·안뜨기와는 결이 다른 말들입니다. 손동작을 지시하는 단어가 아니라, 뜨는 사람의 심리와 사고 현장을 농담으로 붙잡아 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푸르시오입니다. 해리 포터의 크루시오(Crucio)를 희화화한 말입니다. 원래는 고통을 주는 주문인데, 한국 뜨개인은 첫소리를 풀다의 ‘푸르’로 바꿔 코를 푸는 주문으로 만들었습니다. 지팡이 대신 바늘을 들고, 며칠 공들인 소매를 바라보며 외칩니다. 푸르시오. 누구에게 내리는 주문인지는 분명합니다. 나 자신에게입니다.
영어권에는 같은 장면을 frogging이라고 부르는 다른 말장난이 있습니다. 풀 때 나오는 rip it, rip it이 개구리 울음처럼 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는 일은 같아도, 한국어 푸르시오의 리듬은 개구리보다 주문에 가깝습니다. 한 코만 푸는 날도 있고 열 단을 통째로 푸는 날도 있습니다. 시간은 돌아가지만 실은 남습니다. 푸르시오는 포기가 아니라, 다음 단을 다시 고르는 일입니다.
팅크와 집고, 한 코씩 되돌리는 법
푸르시오가 바늘에서 작품을 빼 단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면, 팅크는 그 반대 방향으로 한 코씩 걷는 일입니다. tink는 knit를 거꾸로 쓴 말입니다. 방금 뜬 단 안에서 실수가 눈에 들어왔을 때, 코를 하나씩 풀어 바늘에 다시 걸면 됩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코의 방향이 덜 흐트러집니다. 몇 단 전의 실수라면 팅크보다 푸르시오가 덜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손맛이 있습니다. 코가 바늘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주르륵 풀리면, 코바늘이나 보조 바늘로 그 실 가닥을 다시 집어 올립니다. 이 동작을 집고라고 부르던 분들이 있습니다. 공들인 단이 무너진 자리에서 한 코를 다시 깨우는 일입니다. 이름만 알아도 ‘전부 풀어야 하나’와 ‘여기만 고치면 되나’를 구분하기가 쉬워집니다.
기록을 남길 때도 이 구분이 쓸모 있습니다. “암홀 시작 전에 푸르시오, 게이지가 헐거워서 바늘을 한 호수 줄임”처럼 적어두면, 반대쪽 소매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풀었다는 사실보다, 왜 풀었는지가 다음 세션을 엽니다.
WIP, UFO, FO — 작품의 세 가지 상태
바늘에 걸려 있는 것은 모두 WIP입니다. Work In Progress, 진행 중인 작품입니다. 며칠만 바구니에 두면 같은 덩어리가 UFO가 됩니다. Unfinished Object, 미완으로 겨울잠을 자는 작품입니다. 영어권에서는 hibernating이라고도 부릅니다. 다 떠서 끝맺음까지 한 것만 FO, Finished Object입니다. 세 단어만 알아도 작업 바구니를 열어 볼 때의 기분이 조금 정리됩니다.
문제는 새 도안이 WIP보다 예쁘다는 점입니다. 시작만 반복하는 버릇을 스타티티스라고 부릅니다. start에 염증을 뜻하는 -itis를 붙인 말장난입니다. 특히 양말은 첫 짝을 즐겁게 뜨고, 둘째 짝에서 흥미를 잃는 세컨드 삭 신드롬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쌍이 되는 장갑과 소매도 같은 함정입니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바구니만 보면 무슨 도안인지 구분이 안 되면, 다음 저녁은 뜨기가 아니라 찾기부터 시작됩니다. 작품 이름과 오늘 위치만 있어도 UFO는 다시 WIP가 됩니다.
스타시, 얀치킨, 얀바프 — 실을 둘러싼 말들

스타시는 집에 쌓아 둔 실 재고입니다. 예쁜 타래를 도안보다 먼저 사면 스타시는 늘고, 그 속도가 평생 뜰 양을 넘기면 SABLE이 됩니다. Stash Acquisition Beyond Life Expectancy, 기대 수명 너머의 실 수집이라는 과장된 농담입니다. 죄책감을 주려는 말이 아니라, 상자를 열었을 때 나오는 탄식을 한 단어로 줄인 것입니다.
반대쪽 극단이 얀치킨입니다. 몸판이 거의 끝났는데 타래가 주먹만 하게 남았을 때, 실과 작품이 누가 먼저 끝나나 겨루는 상태입니다. 이기면 FO가 되고, 지면 배색을 넣거나 같은 LOT를 찾아 헤맵니다. 가운데를 뽑아 쓰는 케이크 실이 한순간에 쏟아지면 얀바프라고 부릅니다. 실이 토하는 모양이라니, 이름이 잔인할 만큼 정확합니다.
니트플릭스는 영상을 틀어 두고 손을 움직이는 저녁의 이름입니다. 선물을 떠 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마음은 기프트 니팅이라고들 합니다. 말은 장난이지만 장면은 구체적입니다. 남은 미터, 풀기 전 게이지, 지금 뜨는 단수. 그 숫자를 작품과 실 기록에 남겨 두면, 얀치킨에서 지더라도 다음에 무엇을 사야 하는지 바로 보입니다. KnitBook은 그 순간을 30초만 적어두라고 권하는 쪽에 가깝습니다.